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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애국가 대신 북한 국가 연주…한국 하키 5-0 승리보다 남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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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남자 하키 한국과 방글라데시의 경기에서 애국가 대신 북한 국가가 먼저 연주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한국 선수들은 당황한 모습을 보였고, 현장에서는 사과와 함께 국가 연주가 다시 진행됐다. 경기는 한국이 5-0으로 이겼지만 경기 전 벌어진 일은 대회 운영과 스포츠 의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이 사건을 단순한 음원 선택 실수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국제대회의 국가 연주는 선수와 참가국의 정체성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존중하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민국과 북한의 관계를 고려하면 두 국가를 혼동한 일은 선수와 관중에게 더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한국-방글라데시 남자 하키 경기 한눈에 보기 대회: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남자 하키 A조 날짜: 2026년 9월 18일 장소: 일본 기후현 가카미가하라 그린스타디움 결과: 대한민국 5-0 방글라데시 주요 상황: 경기 전 애국가 대신 북한 국가가 먼저 연주된 뒤 현장 사과와 정정이 이뤄짐 국제하키연맹(FIH)의 공식 결과에는 한국의 5-0 승리가 기록돼 있다. 남자 대표팀은 A조 첫 경기에서 승점과 골 득실을 확보하며 대회를 시작했다. 경기력만 놓고 보면 무실점 대승이라는 긍정적인 출발이었다. 경기 전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선수들이 국가 연주를 위해 도열한 뒤 대한민국 애국가가 나와야 할 순서에 북한 국가가 경기장에 흘러나왔다. 선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당황한 반응을 보였고, 장내 아나운서는 잘못된 음악이 연주됐다며 사과했다. AP 보도에 따르면 운영진은 이후 방글라데시 국가를 연주한 다음 대한민국 애국가를 다시 틀었다. 그러나 예정된 경기 시작 시간이 다가오면서 애국가 연주가 끝나기 전에 선수들이 인사를 진행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잘못을 인지하고 바로잡았지만, 정정 과정까지 매끄럽지는 않았던 셈이다. 대한체육회는 국내 보도를 통해 대회 조직위원회에 사고 경위 설명과 공식...

아시안게임 애국가 대신 북한 국가 연주…한국 하키 5-0 승리보다 남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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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남자 하키 한국과 방글라데시의 경기에서 애국가 대신 북한 국가가 먼저 연주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한국 선수들은 당황한 모습을 보였고, 현장에서는 사과와 함께 국가 연주가 다시 진행됐다. 경기는 한국이 5-0으로 이겼지만 경기 전 벌어진 일은 대회 운영과 스포츠 의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이 사건을 단순한 음원 선택 실수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국제대회의 국가 연주는 선수와 참가국의 정체성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존중하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민국과 북한의 관계를 고려하면 두 국가를 혼동한 일은 선수와 관중에게 더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한국-방글라데시 남자 하키 경기 한눈에 보기 대회: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남자 하키 A조 날짜: 2026년 9월 18일 장소: 일본 기후현 가카미가하라 그린스타디움 결과: 대한민국 5-0 방글라데시 주요 상황: 경기 전 애국가 대신 북한 국가가 먼저 연주된 뒤 현장 사과와 정정이 이뤄짐 국제하키연맹(FIH)의 공식 결과에는 한국의 5-0 승리가 기록돼 있다. 남자 대표팀은 A조 첫 경기에서 승점과 골 득실을 확보하며 대회를 시작했다. 경기력만 놓고 보면 무실점 대승이라는 긍정적인 출발이었다. 경기 전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선수들이 국가 연주를 위해 도열한 뒤 대한민국 애국가가 나와야 할 순서에 북한 국가가 경기장에 흘러나왔다. 선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당황한 반응을 보였고, 장내 아나운서는 잘못된 음악이 연주됐다며 사과했다. AP 보도에 따르면 운영진은 이후 방글라데시 국가를 연주한 다음 대한민국 애국가를 다시 틀었다. 그러나 예정된 경기 시작 시간이 다가오면서 애국가 연주가 끝나기 전에 선수들이 인사를 진행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잘못을 인지하고 바로잡았지만, 정정 과정까지 매끄럽지는 않았던 셈이다. 대한체육회는 국내 보도를 통해 대회 조직위원회에 사고 경위 설명과 공식...

태극기를 처음 올린 순간, 양정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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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가 처음으로 올림픽에 울려 퍼진 날 올림픽 시상대에서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장면, 지금은 익숙하지만 처음 그 순간을 만든 선수가 있어요. 바로 레슬링 선수 양정모예요.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금메달을 목에 걸었어요. 오늘은 이 뜻깊은 순간의 이야기를 해볼게요.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 경기 양정모 선수의 종목은 레슬링 자유형 62킬로그램급이었어요. 그때 레슬링 경기 방식은 지금과는 조금 달랐어요. 여러 선수가 돌아가며 겨루고, 진 경기에서 받은 벌점이 가장 적은 선수가 우승하는 방식이었지요. 양정모 선수는 사실 마지막 경기에서는 상대에게 졌어요. 하지만 그때까지 쌓인 벌점이 다른 선수들보다 적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1위, 즉 금메달을 차지했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누가 우승할지 알 수 없었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였어요. 왜 이 금메달이 특별할까요 사실 우리나라 선수가 올림픽에서 처음 금메달을 딴 건 이때가 아니에요.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먼저 금메달을 딴 적이 있거든요. 하지만 그때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이라, 손기정 선수는 어쩔 수 없이 일본 대표로 뛰어야 했어요. 태극기가 아니라 일본 국기를 달고서요. 그래서 양정모 선수의 금메달이 더 특별해요.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고,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딴 올림픽 금메달이거든요. 시상대에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진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어요. 40년 전 손기정 선수가 흘렸던 눈물이, 이번에는 기쁨의 눈물로 바뀐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경기를 실시간으로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어요. 많은 국민이 라디오나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은 순식간에 온 나라에 퍼졌고, 사람들은 “드디어 우리 힘으로, 우리 이름으로 세계 정상에 섰다”는 벅찬 마음을 함께 나눴답니...

태극전사는 원래 빨간 옷이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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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해 보이는 것에도 역사가 있어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하면 바로 떠오르는 색깔이 있지요. 바로 빨간색이에요. 붉은악마 응원단도, 선수들의 유니폼도 온통 빨간색이라 이제는 너무 당연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이 빨간 유니폼이 늘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던 건 아니에요. 심지어 한때는 흰색으로 완전히 바뀌었던 시절도 있었답니다. 오늘은 태극전사 유니폼 색깔에 숨은 이야기를 풀어드릴게요. 1977년, 처음 빨간색을 입었어요 사실 초창기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은 정해진 색깔이 따로 없었어요. 그때그때 여러 디자인의 유니폼을 돌려가며 입었지요. 그러다 1977년 6월, 한일전 경기를 앞두고 처음으로 빨간색 하의를 입기 시작했어요. 이때부터 시작된 ‘올 레드’(위아래 모두 빨간색) 유니폼 전통은 1993년까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흰색으로 바뀌었어요 1994년 무렵, 놀라운 변화가 생겼어요. 국가대표팀 유니폼이 갑자기 흰색으로 바뀐 거예요. 이유가 재미있어요. 빨간색이 상대 선수들의 투지를 더 불타오르게 만들어서, 오히려 우리 팀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거든요. 그래서 한동안 우리나라 대표팀은 흰색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치렀어요. 2002년, 빨간색이 완전히 자리 잡았어요 지금 우리가 아는 것처럼 빨간색이 국가대표팀의 상징으로 완전히 굳어진 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거치면서예요. 이때는 유니폼을 만드는 회사가 화려한 색을 넣어서, 원래 빨간색이 형광빛이 도는, 분홍색에 가까운 빨간색으로 보이기도 했어요. 그리고 이 시기에 거리마다 빨간 옷을 입은 붉은악마 응원단이 함께하면서, 빨간색은 선수들의 유니폼을 넘어 온 국민이 함께 입는 색깔이 됐어요. 유니폼 색깔 하나가 응원 문화와 딱 맞아떨어지면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상징이 된 거예요. 그 뒤로도 유니폼 디자인은 계속 조금씩 달라지고 있어요. 기본 색은 여전히 빨간색을 지키면서도, 최근에는 민트색 같은 새로운 색을 함께 넣거나, 태극 문양에서 영감을 받은...

만화책 한 권이 농구장을 가득 채웠어요 슬램덩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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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이 체육관을 가득 채운 시절 1990년대, 우리나라 농구 경기장은 늘 사람들로 가득했어요. 특히 대학생 선수들이 뛰는 ‘농구대잔치’라는 대회는, 지금의 아이돌 콘서트 못지않은 열기를 뿜었답니다. 그런데 이 열기의 한가운데에는 뜻밖에도 만화책 한 편이 있었어요. 바로 일본 만화 ‘슬램덩크’예요. 오늘은 만화 한 편이 어떻게 한 나라의 스포츠 붐을 만들어냈는지 이야기해볼게요. 1992년, 한국에 상륙한 만화 슬램덩크는 1992년부터 우리나라 만화 잡지에 연재되기 시작해서 1996년까지 이어졌어요. 단행본으로는 총 31권이 나왔는데, 만화를 별로 안 보던 사람들도 이 만화만큼은 꼭 챙겨볼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어요. 농구를 잘 모르던 학생들도 이 만화를 보고 나서 농구공을 잡아보고 싶어졌다고 할 정도였지요. 드라마까지 가세했어요 비슷한 시기에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있었어요. 1994년 초,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가 방송된 거예요. 이 드라마는 대학 농구팀 이야기를 다뤘는데, 극 중 무대가 바로 농구대잔치였어요. 만화로 농구에 빠진 사람들이, 이번에는 드라마를 보면서 실제 농구 경기까지 찾아보게 됐어요. 대학생 선수가 스타가 됐어요 이 시기 농구대잔치에서는 실제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아직 프로에 데뷔하지 않은 대학생 선수들이 기아자동차, 삼성전자, 현대전자 같은 어른들로 이루어진 실업팀들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이 일어난 거예요. 이때 활약한 선수 중에는 ‘쌕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상민 선수도 있었어요. 곱상한 외모로 큰 인기를 끌면서, 경기장에는 그를 보러 온 팬들, 이른바 ‘오빠부대’가 몰려들었답니다. 농구 선수가 지금의 아이돌처럼 사랑받던 시절이었어요. 세월이 지나도 다시 찾아온 인기 만화 속 주인공들이 온 힘을 다해 코트를 뛰어다니는 모습은, 공부에 지친 학생들에게도 큰 위로와 힘이 됐어요. “포기하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에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만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라 진짜 우리 삶에...

호돌이부터 수호랑까지, 마스코트에 담긴 진짜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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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얼굴 뒤에 숨은 진지한 고민 올림픽이나 큰 국제 대회를 떠올리면, 경기 장면 못지않게 먼저 생각나는 게 있어요. 바로 마스코트예요. 귀여운 호랑이나 곰 인형 같은 캐릭터들이요. 그런데 이 캐릭터들, 그냥 예쁘게만 그린 게 아니에요. 이름 하나, 색깔 하나에도 그 나라와 그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답니다. 오늘은 우리나라가 만든 마스코트들의 숨은 이야기를 풀어드릴게요. 호돌이는 사실 토끼가 될 뻔했어요 19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는 지금도 많은 어른들이 반가워하는 캐릭터예요. 그런데 이 호랑이가 확정되기 전까지, 사실 토끼 캐릭터와 치열하게 경쟁했다고 해요. 최종적으로 호랑이가 뽑힌 건, 호랑이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이에요. 호돌이를 그린 김현 디자이너는 이렇게 설명했어요. “사나운 맹수 호랑이를 귀엽게 그리려고 노력했고, 특히 한국적인 이미지를 더하려고 머리에 상모를 씌웠다”고요. 상모는 우리나라 전통 농악(농사지을 때 하는 음악과 춤)에서 쓰는, 끈이 달린 모자예요. 무서운 호랑이를 귀엽고 친근한 캐릭터로 바꾸면서도, 한국다운 느낌을 놓치지 않으려 한 거예요. 호돌이는 올림픽이 열리기 무려 5년 전인 1983년에 미리 발표돼서, 오랫동안 대회를 홍보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답니다. 수호랑과 반다비, 이름에도 뜻이 있어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는 두 마스코트가 함께 등장했어요. 백호(하얀 호랑이) ‘수호랑’과 반달가슴곰 ‘반다비’예요. 이름부터 살펴볼까요? ‘수호랑’에서 ‘수호’는 선수와 관중을 보호한다는 뜻이고, ‘랑’은 호랑이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강원도의 유명한 민요 ‘정선아리랑’도 함께 떠올리게 만들어요. ‘반다비’에서 ‘반다’는 반달을 뜻하고, ‘비’는 대회를 기념하는 비석의 ‘비’자를 땄어요. 호랑이와 반달가슴곰을 고른 이유도 있어요. 둘 다 우리나라와 강원도를 대표하는 동물이거든요. 수호랑은 겨울 올림픽에 어울리게 새하얀 백호로 그렸는데, 흰색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을 ‘백의민...

신발을 벗은 순간, 대한민국이 울었다 박세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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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벗은 순간, 대한민국이 숨죽였어요 1998년 7월, 미국 위스콘신주의 한 골프장. 스무 살 박세리 선수가 US여자오픈 마지막 순간, 갑자기 신발과 양말을 벗었어요. 공이 물가 옆 풀숲에 빠졌거든요. 보통 같으면 벌점을 받고 다시 치는 게 당연했어요. 그런데 박세리 선수는 맨발로 물속에 들어가 공을 쳐냈어요. 이 장면 하나가 대한민국을 울고 웃게 만들었답니다. 오늘은 이 순간이 왜 그렇게 큰 의미를 가졌는지 이야기해볼게요. 왜 그토록 온 국민이 이 장면에 매달렸을까요 1998년은 우리나라에게 아주 힘든 해였어요. 이른바 ‘IMF 외환위기’라는 시기였거든요. 많은 회사가 문을 닫고,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던 때였어요. 온 국민이 힘들고 지쳐 있던 그 시절, 박세리 선수의 우승 소식은 마치 큰 선물처럼 다가왔어요. 나라 밖에서,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의 대회에서 한국인이 당당히 우승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어요. 이 맨발 샷 장면은 나중에 텔레비전 애국가가 나올 때 배경 영상으로 쓰였을 만큼, 국민에게 깊이 새겨진 순간이 됐답니다. ‘귀족 운동’이라 불리던 골프가 달라졌어요 박세리 선수의 우승 전까지, 골프는 “돈 많은 사람들만 하는 운동”이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그런데 이 우승 이후로 그 생각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어요. 골프를 배우려는 사람이 크게 늘었고, 골프장 수도 크게 늘어났어요. 실제로 1998년에는 우리나라에 골프장이 97개뿐이었는데, 2024년에는 524개로 늘었을 정도예요. 한 사람의 우승이 스포츠 산업 전체를 바꿔놓은 셈이지요. ‘세리키즈’라는 새로운 세대가 태어났어요 박세리 선수의 우승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자란 어린이들이 있었어요. 그 아이들 중 상당수가 “나도 박세리 선수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골프채를 잡았어요. 골프연습장마다 어린 자녀에게 골프를 가르치려는 부모들로 붐볐다고 해요. 이렇게 자란 선수들이 훗날 박인비, 신지애, 최나연 같은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어요...

태권도가 올림픽에서 쫓겨날 뻔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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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무술이 세계인의 스포츠가 되기까지 태권도는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이 배우는 운동이에요. 미국, 유럽, 남미 어디를 가도 태권도장을 찾을 수 있을 정도지요. 그런데 이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기까지, 사실 순탄하지만은 않았어요. 한때는 올림픽에서 아예 빠질 뻔한 적도 있었답니다. 오늘은 태권도가 세계인의 스포츠로 자리 잡기까지의 이야기를 풀어드릴게요. 1988년, 우리 땅에서 처음 선보였어요 태권도가 올림픽 무대에 처음 등장한 건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어요. 그런데 이때는 ‘시범 종목’이었어요. 정식으로 메달 순위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먼저 세계에 태권도를 소개하는 자리였던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대회였기 때문에, 우리 전통 무술을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이기도 했지요. 이후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올림픽까지도 시범 종목으로 이어졌어요. 한 번은 올림픽에서 빠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에서는 태권도가 아예 빠졌어요. 시범 종목으로 계속 남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됐기 때문이에요. 태권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시기였을 거예요. 하지만 이 시기 동안 규칙을 더 안전하고 공정하게 다듬는 노력이 이어졌어요. 특히 머리 보호대와 가슴 보호구를 착용하도록 정해서, 선수들이 다치지 않으면서도 박진감 있게 겨룰 수 있도록 바꿨답니다. 2000년, 드디어 정식종목이 됐어요 참고로 태권도를 이끄는 세계태권도연맹은 1973년 5월 28일, 서울 국기원에서 만들어졌어요. 그때 이미 35개 나라의 대표들이 모였을 정도로, 태권도는 이미 세계 곳곳에 퍼져 있었답니다. 이런 노력 끝에 2000년 호주 시드니올림픽부터 태권도는 드디어 정식 종목으로 인정받았어요. 이제부터는 태권도에서도 진짜 올림픽 메달이 걸리게 된 거예요. 그리고 2013년에는 ‘핵심 종목’으로 지정됐어요. 핵심 종목이 되면, 앞으로 올림픽에서 빠질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에요. 오랜 우여곡절 끝에, 태권도는 이제 확실하게 자리를 잡...

달리기만 했는데 그림이 그려 졌어요 러닝크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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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 신고 그림을 그린다고요? 서울 마곡 지역에는 요즘 특별한 달리기 코스가 있어요. 서울식물원에서 출발해서 신방화역, 방화전통시장을 거쳐 다시 돌아오는 약 7.5킬로미터 코스예요. 그런데 이 길을 스마트폰 지도 앱으로 보면, 신기하게도 통통한 카피바라 모양이 그려져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코스를 ‘카피바라런’이라고 불러요. 경복궁 돌담길과 서촌, 북촌, 청계천을 잇는 길은 강아지 모양이 나와서 ‘댕댕런’이라고 부르고요. 달리기가 이렇게 재미있는 놀이가 됐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요즘 달리기는 그냥 ‘운동’이 아니라, 친구를 만나고 사진을 남기고 SNS에 자랑하는 ‘문화’가 됐어요. 오늘은 이 러닝 열풍 이야기를 해볼게요. 5년 사이 100배 넘게 늘어난 숫자 숫자로 보면 이 변화가 얼마나 큰지 더 잘 보여요. 2020년에는 국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사람이 약 9천 명이었어요. 그런데 2024년에는 100만 명이 넘었어요. 4년 만에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거예요. 특히 20대와 30대가 참가자의 60%를 차지할 만큼, 젊은 세대가 이 열풍을 이끌고 있어요. 왜 이렇게 갑자기 늘었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 시작하기가 쉬워요. 골프나 테니스는 비싼 장비와 장소가 필요하지만, 달리기는 운동화 한 켤레만 있으면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어요. 둘째, 스마트워치나 달리기 애플리케이션(앱)이 재미를 더해줘요. 오늘 얼마나 달렸는지, 얼마나 빨라졌는지 기록이 착착 쌓이니까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재미있거든요. 셋째, 가장 큰 이유는 ‘함께 달리는 문화’예요. ‘러닝크루’라고 부르는 달리기 모임이 곳곳에 생겼어요. 혼자 달리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서 달리고, 달린 뒤에는 카페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운동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사교 활동이 된 셈이에요. 달리기가 SNS 콘텐츠가 됐어요 예전에는 달리기를 하면 얼마나 빨리,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 기록만 중요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달라요. ...

외국인이 한국 야구장에서 놀라는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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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에 갔다가 홀딱 반한 외국인들 요즘 부산 사직야구장에는 재미있는 손님들이 늘었어요. 바로 외국인 관광객이에요. 중국에서 온 20대 관광객은 부산에 오기 전까지 야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대요. 그런데 챗GPT로 야구 규칙을 배워가며 경기를 보더니, 이제는 응원가까지 따라 부를 정도로 푹 빠졌다고 해요. 중국의 한 SNS에는 “부산 야구장 표는 어떻게 구하나요?” 같은 질문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고요. 외국인이 놀라는 건 관광객만이 아니에요.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가 한국에서 경기를 했을 때,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치어리더들이 경기 내내 열심히 응원을 하더라. 굉장히 흥미로웠다. 에너지가 넘쳤다. 메이저리그에선 볼 수 없는 분위기다”라고 말했어요. 투수 타일러 글래스노우 선수도 “독특했다. 열정이 느껴졌다. 소리가 굉장히 크고 열정적인 분위기였다”고 했지요. 도대체 한국 야구장에는 어떤 특별한 문화가 있는 걸까요? 처음에는 그냥 손뼉만 쳤어요 우리나라 프로야구는 1982년에 처음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때는 지금 같은 응원 문화가 없었어요. 관중들은 그냥 자기 마음대로 손뼉을 치거나, 즉흥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지요. 정해진 응원 방법 같은 건 없었어요. 그러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변화가 생겼어요. 치어리더와 응원단장이라는 역할이 새로 생긴 거예요. 그리고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 우리가 아는 것 같은, 활기차고 체계적인 응원 문화가 자리 잡았답니다. 선수마다 노래가 다르다고요? 한국 야구장 응원의 가장 큰 특징은 ‘선수마다 응원가가 다르다’는 거예요. 어떤 선수가 타석에 나오면, 그 선수만을 위한 노래가 울려 퍼져요. 이 노래는 대부분 사람들이 잘 아는 팝송이나 가요를 가사만 바꿔서 만들어요. 그래서 처음 듣는 사람도 몇 번만 들으면 금방 따라 부를 수 있어요. 각 팀에는 치어리더 4~5명 정도와 응원단장 1명이 있어요. 응원단장이 앞장서서 구호를 외치면, 치어리더들이 거기에 맞춰 춤을 추고, 관중들은 다 ...

금메달을 따고도 고개를 숙인 선수, 손기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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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을 따고도 웃지 못한 선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누구나 활짝 웃으며 태극기, 아니 자기 나라 국기를 올려다봐요. 그런데 1936년, 어떤 선수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어요. 손에 든 월계수 화분으로 가슴에 달린 표시를 애써 가리기까지 했지요. 이 사진은 지금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예요. 오늘은 이 선수, 손기정 이야기를 해보려 해요. 세계 신기록으로 딴 금메달 손기정 선수는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나갔어요. 42.195킬로미터를 2시간 29분 19초 만에 달려서, 당시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땄어요. 정말 대단한 기록이었지요. 그런데 이 기쁜 순간에는 말 못 할 아픔이 숨어 있었어요. 그때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이었어요. 나라를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손기정 선수는 어쩔 수 없이 ‘일본 대표’로 올림픽에 나가야 했어요. 가슴에는 태극기가 아니라 일본 국기를 달아야 했고요. 시상대에 올라 일본 국기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손기정 선수는 눈물을 흘렸다고 해요. 신문사들이 목숨 걸고 지운 사진 이 소식을 들은 국내 신문사들은 가만있지 않았어요. 조선중앙일보라는 신문사의 유해봉이라는 기자는, 손기정 선수 사진에서 가슴에 달린 일본 국기를 몰래 지우고 신문에 실었어요. 1936년 8월 13일의 일이었어요. 12일 뒤에는 동아일보도 똑같은 일을 했어요. 기자들이 사진을 인쇄판으로 만들 때 화학약품을 써서 일본 국기 부분을 없앤 거예요. 지금처럼 컴퓨터로 쉽게 지우는 게 아니라, 손으로 하나하나 지워낸 거라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요. 이 일은 당시 일본 정부를 크게 화나게 했어요. 두 신문은 큰 벌을 받았어요. 동아일보는 신문을 낼 수 없게 됐다가(이를 ‘정간’이라고 해요) 279일 만에 다시 신문을 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조선중앙일보는 달랐어요. 신문을 다시 낼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

영화 '국가대표', 알고 보면 더 감동적인 진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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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만 명이 본 영화, 사실은 더 대단한 이야기였어요 2009년 여름, 극장에 특별한 영화가 걸렸어요. 제목은 <국가대표>였어요. 축구도 야구도 아닌 ‘스키점프’라는, 우리에게는 낯선 운동을 다룬 영화였지요. “사람들이 잘 볼까?” 걱정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하지만 이 영화는 848만 명이 넘는 관객이 봤어요. 그리고 다음 해인 2010년에는 백상예술대상이라는 큰 영화 시상식에서 작품상도 받았어요. 그런데 이 영화, 사실은 진짜 있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아시나요? 오늘은 영화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이야기를 쉽게 풀어드릴게요.  1998년, 아무도 모르던 스키점프 국가대표팀 영화의 배경은 1997년에서 1998년이에요. 그때 한국에는 ‘스키점프’라는 운동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연습할 시설도 부족했고, 선수도 몇 명 없었지요. 그런데도 최흥철, 최서우, 김현기, 강칠구, 이렇게 네 명의 선수가 모여서 국가대표팀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1998년, 일본 나가노에서 열린 겨울 올림픽에 처음으로 나갔어요. 한국 스키점프 선수가 올림픽에 나간 건 이때가 처음이었답니다. 성적은 좋지 않았어요. 세계 최고 선수들과 실력 차이가 컸거든요. 순위는 뒤쪽이었어요. 하지만 이 선수들은 정말 큰 일을 해냈어요. 별다른 도움 없이도 올림픽에 나갔고, 한국 스키점프의 이름을 세계에 처음 알렸어요. 그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지요. 이 중 최흥철 선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했어요. 2003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열린 대학생 겨울 스포츠 대회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땄고요. 2011년과 2017년에는 아시아 겨울 대회에서도 메달을 땄어요. 영화와 진짜 이야기, 다른 점은 뭘까요? 영화에서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이 나와요. 이 약속 때문에 선수들은 더 필사적으로 노력하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조금 달랐어요. 그때 법으로는 올림픽에서 동메달만 따도 군대 대신 다른 일을 할 수 있었어...

은퇴하고도 여전히 '여왕'인 이유, 김연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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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인데, 왜 ‘여왕’이라고 부를까요? 스포츠 선수에게 ‘여왕’이라는 별명을 붙이는 일은 흔치 않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피겨 여왕’이라고 불리는 선수가 있어요. 바로 김연아 선수예요. 단순히 메달을 많이 따서가 아니에요. 그가 얼음판 위에서 보여준 모습이, 스포츠를 넘어 하나의 문화가 됐기 때문이에요. 오늘은 김연아 선수의 이야기를 통해, 운동선수가 어떻게 온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문화 아이콘이 되는지 살펴볼게요. 일곱 살 소녀, 얼음판에 반하다 김연아 선수는 1996년, 일곱 살 때 경기도 과천에 있는 실내 빙상장에 놀러 갔다가 처음 스케이트를 신어봤어요. 그 뒤 한 코치 선생님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피겨스케이팅을 배우기 시작했지요. 재능은 금방 드러났어요. 겨우 열네 살이던 2003년, 김연아 선수는 벌써 국가대표로 뽑혔어요. 2010년, 세계가 놀란 228.56점 김연아 선수의 이름을 온 국민에게, 그리고 전 세계에 알린 건 2010년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이었어요. 쇼트프로그램에서 78.50점, 프리스케이팅에서 150.06점을 받아 합계 228.56점을 기록했어요. 이 점수는 모두 세계 신기록이었어요. 이 경기로 김연아 선수는 우리나라 선수 중 처음으로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금메달을 땄어요. 이날 연기도 참 인상적이었어요. 쇼트프로그램에서는 영화 ‘007’ 시리즈에 나온 음악들을 모아 연기했고, 프리스케이팅에서는 미국 작곡가 조지 거슈윈의 곡에 맞춰 얼음을 갈랐어요. 스포츠 경기이면서 동시에 한 편의 음악과 춤 공연처럼 느껴진다는 평이 많았어요. 그날 얼음판 위의 연기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서, 마치 한 편의 예술 작품처럼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렸답니다. 은퇴하고도 계속된 사랑 김연아 선수는 2014년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물러났어요. 그런데 은퇴한 뒤에도 인기는 식지 않았어요. ‘올댓스케이트’라는 아이스쇼에 여러 해 동안 출연하면서 팬들과 계속 ...

2002년엔 있었는데 2026년엔 없다? '오 필승 코리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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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있었는데, 지금은 왜 없을까요?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이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2002년 여름이 떠오르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그해 6월, 온 나라가 빨간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와 ‘오 필승 코리아’를 목이 터져라 불렀지요. 그런데 올해, 2026년 월드컵 때는 어땠나요? 예전처럼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부르는 응원가가 딱히 없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같은 월드컵인데,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오늘은 ‘오 필승 코리아’와 붉은악마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 응원 문화가 어떻게 시작됐고 왜 변했는지 쉽게 풀어드릴게요. ‘오 필승 코리아’는 사실 외국 노래였어요 많은 분들이 ‘오 필승 코리아’를 순수 우리나라 노래로 알고 계세요. 그런데 사실 이 노래의 멜로디는 원래 유럽 축구팀을 응원할 때 부르던 노래였어요. 1996년 즈음, 케이블 방송에서 스페인 축구 경기를 중계할 때 이 멜로디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됐다고 해요. 그 뒤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 프로축구(K리그)에도 응원 문화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때 부천에 있던 한 축구팀의 서포터즈 모임(이름은 ‘헤르메스’였어요)이 이 외국 멜로디에 우리말 가사를 붙였답니다. 그렇게 ‘오 필승 코리아’가 태어났어요. 처음에는 그냥 한 축구팀을 응원하는 노래였는데,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붉은악마의 공식 응원가로 정해졌고, 가수 윤도현 밴드가 부른 버전이 널리 퍼지면서 온 국민이 아는 노래가 됐어요. 붉은악마는 언제, 왜 생겼을까요? 붉은악마는 1996년에서 1997년 사이에 만들어졌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사람들은 ‘PC통신’이라는 컴퓨터 통신망에서 모임을 만들었어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PC통신에서 축구 동호회를 만든 게 붉은악마의 시작이었지요. 처음에는 이름이 달랐는데, 1997년에 ‘붉은악마’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이 이름에는 특별한 뜻이 있어요. 1983년,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우리나...

'국가대표'가 된 게임 이야기 e스포츠와 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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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도 국가대표가 있다고요? 지난 8월 25일, 서울 마포구의 한 컨벤션센터에 태극마크를 단 선수 40여 명이 모였어요. 곧 열릴 아시안게임에 나갈 국가대표 선수단이 모여 다짐하는 자리, 이른바 ‘출정식’이었지요. 그런데 이 선수들이 준비하는 종목이 조금 특별해요. 축구도, 수영도 아닌 ‘게임’이거든요. 바로 ‘이스포츠’예요. “게임하는 걸 스포츠라고 부른다고?”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분도 계실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스포츠는 어엿한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이 됐어요. 오늘은 게임이 어떻게 ‘진짜 스포츠’가 됐는지, 그리고 이 국가대표팀에 왜 그렇게 큰 관심이 쏠리는지 쉽게 풀어드릴게요. 게임이 스포츠가 되기까지, 8년의 시간 이스포츠가 아시안게임에 처음 등장한 건 2018년이에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이스포츠는 ‘시범 종목’으로 소개됐어요. 시범 종목이란, 정식으로 인정받기 전에 “한번 보여드릴게요” 하고 먼저 선보이는 종목을 말해요. 그래서 이때는 메달을 따도 국가별 순위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러다 2022년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코로나 때문에 실제로는 2023년에 열렸어요)부터 이스포츠는 드디어 ‘정식 종목’이 됐어요. 정식 종목이 되면 다른 스포츠와 똑같이 메달 수도 순위에 정식으로 들어가요. 이때 한국은 인기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 종목에서 대만을 2대 0으로 꺾고 우승했어요. 예선부터 결승까지 한 번도 안 지고 우승한, 아주 시원한 승리였답니다. 이스포츠가 정식 종목이 된 첫 대회에서 딴 첫 금메달이라 의미가 더 컸어요. 몸살에도 흔들리지 않은 팀워크 이때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이 종목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인 ‘페이커’(본명 이상혁) 선수는 사실 결승전에 나오지 못했어요. 대회 도중 몸살이 심하게 났거든요. 그런데도 함께 준비한 다른 선수(쵸비 선수)가 그 자리를 훌륭히 채웠고, 팀은 흔들림 없이 우승을 지켜냈어요. 한 명의 스타 선수만이 아니라, 팀 전체가 함께 만든 우...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영화가 담은 실화와 각색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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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영화 중에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문구가 유독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오늘 스포츠&컬쳐 스토리 에서 다룰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요. 흔히 '우생순'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이 영화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어떤 일이 있었고, 영화는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 각색인지 함께 살펴볼게요. 실제로 있었던 일: 2004년 아테네, 그 연장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전에서 대한민국은 덴마크와 맞붙었습니다. 전반전도, 후반전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동점으로 끝났고, 연장전마저 동점으로 마무리되면서 결국 승부던지기(7m 스로) 까지 가는 초접전이 펼쳐졌습니다.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 이 승부에서 한국은 아쉽게 패하며 은메달 을 목에 걸었습니다. 결과만 보면 '아쉬운 준우승'이지만, 이 경기가 특별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 대표팀에는 이미 은퇴를 고민할 나이의 베테랑 선수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고, 심지어 소속팀 없이 올림픽 무대에 나선 선수 까지 있을 정도로 여자 핸드볼을 둘러싼 환경은 열악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낸 결승 진출이었기에,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이미 드라마였던 거예요. 영화가 사실적으로 담아낸 것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이유는, 단순히 스포츠 경기를 재현해서가 아니라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 겪는 현실 을 가감 없이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서 나이 든 선수들이 다시 대표팀에 모이고, 넉넉하지 않은 지원 속에서 훈련하는 모습은 실제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처했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지점은 영화의 결말 입니다. 많은 스포츠 영화들이 극적인 재미를 위해 실제로는 지거나 아쉽게 끝난 경기를 승리로 각색하곤 하는데, 이 영화는 실제 결과 그대로 은...

오 필승 코리아, 응원가 하나가 만든 대한민국 축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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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경기장에서 울려 퍼지는 응원가 한 곡이 나라 전체를 붉은 물결로 물들이고, 심지어 대중가요 차트까지 흔들어 놓을 수 있을까요? 스포츠&컬쳐 스토리 에서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유럽의 한 축구장 응원가에서 시작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따라 부르는 노래가 된 "오 필승 코리아" , 그리고 이 노래가 만들어낸 '길거리 응원'이라는 새로운 문화 이야기를 풀어볼게요. 유럽 축구장에서 태어난 멜로디 "오 필승 코리아"의 멜로디는 원래 한국에서 만든 곡이 아니었습니다. 유럽 축구 팬들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불리던 응원가 스타일의 멜로디가 원형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 멜로디가 1990년대 국내 K리그 서포터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국내 축구팬들이 이 곡조에 자신들만의 응원 가사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즉, 처음부터 '국가대표 응원가'로 태어난 게 아니라 축구장 관중석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노래 였던 셈이에요. 스포츠 응원가가 대부분 그렇듯, 특정 작곡가가 앉아서 만들었다기보다 팬들의 목소리를 거치며 조금씩 완성된 곡에 가깝습니다. 붉은악마, 국가대표 응원가로 다시 쓰다 이 멜로디가 국가대표팀 응원단인 붉은악마 에게 넘어오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오 필승 코리아"의 가사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붉은악마를 만든 사람들 중 상당수가 K리그 서포터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익숙하게 불러온 이 응원가를 국가대표 경기장으로 자연스럽게 가져올 수 있었던 거예요. 이렇게 보면 "오 필승 코리아"는 유럽 축구 문화 → 한국 K리그 서포터 문화 → 국가대표 응원 문화 로 이어지는, 스포츠 응원 문화가 국경을 넘어 전해지고 변형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2년, 대한민국 전체가 따라 부른 노래 결정적인 순간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습니다. 윤도현밴드(YB)가 부른 버전이 붉은악마의 공식...

축구 유니폼 등번호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축구 경기를 볼 때 선수들 등 뒤에 적힌 숫자를 본 적 있으시죠? 손흥민 선수의 7번, 메시 선수의 10번처럼 등번호는 선수를 상징하는 중요한 표시입니다. 하지만 아주 옛날에는 축구 유니폼에 번호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오늘은 축구 유니폼에 등번호가 언제, 왜 생기게 되었는지 알기 쉽게 소개해 드립니다. 원래는 번호 없이 경기를 했습니다 1900년대 초반만 해도 축구선수들은 아무런 번호가 없는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뛰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중석에 앉은 팬들이나 경기장 안의 심판들은 멀리서 뛰는 선수가 누구인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특히 날씨가 나쁘거나 안개가 끼는 날에는 더욱 혼란스러웠지요. 1928년,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등번호 축구 경기에서 등번호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28년 8월 25일, 잉글랜드 프로축구 리그 였습니다. 당시 명문 구단이었던 아스널(Arsenal) 과 첼시(Chelsea) 가 관중과 심판이 선수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유니폼 뒷면에 번호를 새기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선발 선수 11명에게 1번부터 11번까지 번호를 부여했습니다. 골키퍼는 1번, 공격수는 9번이나 10번을 달았습니다. 초기에는 "유니폼에 숫자를 적는 것은 어색하다"라는 반대도 있었지만, 경기를 보기 훨씬 편해졌다는 사실이 증명되면서 전 세계 축구장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단순한 구분을 넘어 상징이 된 숫자의 의미 처음에는 단순히 '선수를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등번호가 오늘날에는 각 포지션과 선수의 실력을 상징하는 멋진 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마치 이름을 대신하듯 선수의 정체성이 된 등번호! 알고 보면 스포츠 역사 속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지혜였습니다.